‘늑대 군단’ 화웨이의 리더 런정페이 | 상과 벌에 리더도 예외가 될 수 없다​

2018-03-29

세계 IT시장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성장하는 기업 화웨이. 이 화웨이가 주목받는 것은 보통의 IT기업 분위기, 즉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문화와는 다른 독특함 때문이다. 화웨이의 기업 문화는 한마디로 엄격한 규율, 독재적인 리더십, 상명하복의 명령식 기업 문화이다. 이는 창업주이자 지금도 현장에서 돌격대장처럼 지휘하는 화웨이의 ‘정신적인 지주’ 런정페이의 리더십에서 비롯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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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이자 열정의 리더

지난 2월26일 스페인 바르셀로나 피라전시장에서 열린 세계 최대의 모바일 전시회 2018MWC(Mobile World Congress). 전 세계 약 2300여 개의 기업이 참여하는 이 전시회의 ‘올해의 스타’는 단연 화웨이였다.화웨이의 전시장은 삼성전자의 16배였고 MWC 출입증 목걸이로 쓰이는 줄에도 전시회 메인 스폰서격인 화웨이의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이런 외형적인 모습 외에 화웨이는 ‘발롱 5G01’이라는 5G네트워크 표준 기술을 지원하는 칩을 선보이며 “영국의 보다폰과 5G기술을 상용화했다”는 발표를 뒷받침했다. 또한 이 전시회의 부대행사인 ‘MWC 글로모 어워즈Global Mobile Awards’에서 8관왕에 오르며 5G 장비와 솔루션 분야에서의 기술력을 과시했다. 1987년 중국 남부 선전에서 창업한 화웨이는 중국의 경제 성장과 그 궤를 같이 한다. 창업자 런정페이와 5명의 동업자는 한화 약 360만 원으로 화웨이를 시작했다. 30년이 지난 지금 화웨이는 중국 500대 민간 기업 중 1위, 세계 빅3의 통신회사, 직원 수 약 18만 명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더구나 중국 통신 시장 점유율 1위이지만 매출액의 약 75%를 해외에서 벌어들이며 약 150여 개 국에 진출해 10억 명 이상이 사용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세계 상위 통신업체 50여 개 중에서 40여 개 사 이상과 파트너십을 맺고 있다. 또 있다. 현재 중국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 1위, 세계 시장에서는 삼성, 애플에 이어 3위의 점유율이다. 이 같은 외형적인 성과 못지않게 화웨이를 주목하는 것은 그 성장의 질에 있다. 보통의 중국 IT기업에 대한 선입견은 ‘짝퉁’ ‘특허 도용’ ‘모방식 창조’ 등이다. 하지만 화웨이는 그 인식에 동의하지 않는다. 런정페이는 ‘기술 개발’에 대한 집념으로 화웨이는 전 직원의 약 40%를 R&D인력으로 구성하고 매출의 15% 이상을 R&D에 투자해 현재 ‘기술과 특허 왕국’을 구축하고 있다.

세계지식재산권기구(WIPO)에 따르면, 화웨이는 2014년 3442건 특허 출원, 2015년 3898건의 지재권을 출원해 중국 내 4만여 개의 스마트폰 관련 특허 중에 3만 건을 보유할 정도로 엄청난 특허를 출원했다. 화웨이는 이를 바탕으로 세계 시장에 진출할 수 있었다. 또한 미국 실리콘밸리, 러시아 모스크바, 스웨덴 스톡홀름, 인도 방갈로르에 거점 센터를 운영하면서 기술 개발 특히 소프트웨어 신기술에 집중하고 있다.

2016년 5월, 화웨이는 삼성전자를 상대로 ‘삼성이 화웨이의 4G 이동통신 관련 특허를 무단 사용했다’며 미국과 중국 법원에 특허 침해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중국 기업이 삼성전자에 소송을 제기한 것은 화웨이가 처음이었다. 이는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시각도 있지만 런정페이의 ‘특허 핵우산(nuclear umbrella)’ 전략의 일환이다. 런정페이의 이러한 행보는 화웨이가 독자적인 기술무기로 ‘특허 보호막’을 쳐 글로벌 시장 장악력을 높이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이처럼 매출, 기술, 전략 등에서 화웨이는 세계 IT업계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다. 그중에서도 화웨이가 주목받는 이유는 보통의 IT기업의 분위기, 즉 개방적이고 자율적인 문화와는 다른 독특한 기업 문화 때문이다. 화웨이의 기업 문화는 엄격한 규율, 독재적인 리더십, 상명하복의 명령식 문화이다. 이는 창업주이자, 지금도 현장에서 돌격대장처럼 지휘하는 런정페이의 리더십에서 비롯됐다.

런정페이는 당근과 채찍을 명확히 휘두르는 리더이다. 그는 지금도 성과가 낮은 하위 5%의 직원은 상시 구조조정하고 있다. 대신 성과에 대한 보상은 파격적이다. 구내 식당은 특급 호텔 뷔페식당처럼 꾸몄고, 수익 목표가 달성되면 파격적인 보너스로 직원들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해준다. 또한 회사를 옮기면서 직원들에게 시세의 30%의 가격으로 아파트를 분양하는 등 통 큰 경영을 보여주고 있다. “연말 보너스에 돈을 아끼지 않겠다. 다만, 기여도에 따라 금액은 물론 지급 시기를 조절하겠다. 대신 도태되는 직원은 결국 잘려져 나갈 수밖에 없다. 좋게 만났으니 좋게 헤어지자”고 말하는 냉정한 리더가 바로 런정페이이다. 그가 목표를 세우고 ‘돌격명령’을 내리면 화웨이의 전 직원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 이른바 ‘목표지상주의 문화’가 있는 것이다.

기업의 사훈도 미국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의 교훈을 참고해 ‘죽어야 산다’라는, IT기업과는 어울리지 않는 살벌한 구호를 쓰고 있다. 아직도 야근을 밥 먹듯이 하고 일에 몰두하느라 가정 생활을 소홀히 해 이혼당했다는 것을 ‘자랑’처럼 말하는 직원이 있는가 하면, 사무실에서 야전침대를 사용하는 것을 전통으로 여기는 기업이다.

더구나 화웨이는 “창업 후 50년 동안은 기업 공개를 하지 않겠다”는 런정페이의 말처럼 기업의 지배구조 또한 남다르다. 창업주인 런정페이는 1.4%의 지분만을 소유하고 있으며 나머지 98.6%는 공회 즉 직원 노조의 소유이다.

런정페이는 기업의 이익을 직원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며 외부 자본 유입이 기업의 문화와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는 CEO이다. 이 같은 독특한 지배구조와 런정페이의 중국 인민해방군 근무 이력, 인민해방군을 비롯한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인해 화웨이는 성장할 수 있었다. 한편 이 같은 이유 등으로 미국은 화웨이를 중국 정부의 기업으로 보고 도감청 위험을 염려해 한국을 비롯한 우방국에 화웨이의 통신 네트워크 장비 사용 금지를 요구하기도 했다. 사실 화웨이가 미국의 주장대로 ‘통신 스파이 기업’인지, 아니면 화웨이가 신흥 IT기업으로 국제적인 비중이 커지면서 중국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는 미국의 속내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런정페이의 ‘제왕적 리더십’은 연구대상이다. 그의 별명은 ‘군인 CEO’ ‘늑대 같은 기업가’ 등이다. 런정페이는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화웨이가 달성해야 할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중국과 함께하는 ‘화웨이 굴기(몸을 일으킴)’이다. 세계 통신시장 1위, 스마트폰 출고량 2억 대가 바로 화웨이의 올해 목표이다.

화웨이와 런정페이를 일컫는 ‘야전 침대 문화’ ‘늑대 문화’에 부정적 시선도 있지만, 창업 30년 만에 ‘기술 기업’ ‘1등 기업’의 기치를 내걸 수 있었던 것은 런정페이의 열정의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런정페이, 그는 43세의 늦은 나이에 창업에 성공해 통신기술이라는 한 우물을 판 화웨이의 ‘독재자이자 리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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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겪고 화웨이를 창업하다

런정페이는 1944년 중국 구이저우성 안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중학교 교장이고 어머니 역시 학교 교사였다. 7남매 중 장남인 런정페이는 늘 경제적으로 부족했다. 고등학생 런정페이의 소원은 하얀 밀가루로 만든 만두를 먹는 것이었다. 그러나 런정페이는 부모님의 영향으로 가난해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충칭토목공학대학 건축과에 입학한 런정페이에게 불행이 닥친 것은 대학교 3학년 때인 1966년이다. 당시 중국은 문화대혁명 바람으로 피의 물결에 흔들렸다. 런정페이의 아버지가 국공내전(중국 내 항일전쟁 이후 중국 재건을 둘러싸고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벌어진 전쟁-두산백과) 시절 국민당 정부의 군수공장 경리로 일했다는 전력이 밝혀지면서 런정페이는 순식간에 ‘반동분자의 아들’이 되었다. 모진 박해와 비판이 쏟아졌고 집안은 순식간에 풍비박산 났다. 런정페이 역시 축사에서 지내는 신세가 되었지만 아버지는 런정페이에게 단 한 가지만을 당부했다. “지식은 힘이다. 다른 사람은 못 배워도 너는 꼭 공부를 해서 힘을 갖추어라.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오로지 배워야 한다.”

문화대혁명의 바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런정페이는 아버지의 당부를 잊지 않았다. 그는 정보, 통신, 컴퓨터 관련 지식을 독학으로 익혀나갔고 영어 등 외국어 공부도 잊지 않았다. 런정페이는 대학 졸업 후 인민해방군에 입대해 통신병과에서 근무했다. 군대 시절에도 런정페이는 능력을 발휘해 전국 군 과학대회에 참가해 우수한 성적을 올렸다. 하지만 수상의 영광은 런정페이를 멀리했다. 연좌제로 인해 런정페이는 승진, 포상 등에서 늘 제외되었다. 물론 공산당 입당도 번번이 좌절되었다. 1984년 런정페이는 군에서 제대했다. 그리고 전자회사에 입사해 처음으로 IT분야를 접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한 그는 부사장까지 승진했지만 사기 사건에 연루되어 회사를 불명예스럽게 퇴사했다.

런정페이는 독자적인 사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1987년, 중국 개혁개방의 상징 광동성 선전. 그는 중국 우전부 소속 정보통신연구소 연구원 5명과 약 360만 원의 자본으로 화웨이를 설립했다. 런정페이의 나이 43세 때이다. 훗날 런정페이는 “창업 때 나는 이미 불혹을 넘긴 나이였다. ‘불혹不惑’은 그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지만 나는 컴퓨터 시대가 시작되는 것을 느꼈고 그 세상의 강렬한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고 당시의 심정을 밝혔다. 회사 이름 화웨이는 ‘중화민족에 미래가 있다’는 뜻의 ‘중화유위(中華有爲)’를 줄인 말로 ‘중국을 위해 행동에 나선다’는 뜻을 담고 있다.

훗날 화웨이가 안정화되면서 런정페이는 ‘통신을 통해 삶을 풍요롭게 한다’와 ‘고객이 최대의 가치를 창출할 수 있도록 ICT 솔루션과 서비스를 제공하여 고객의 요구와 시장과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한다’는 기업 목표를 제정했다. 화웨이의 비전은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표어는 ‘네트워크 세상의 파트너’이다.

사업 초기 런정페이는 일종의 보따리 장사였다. 홍콩에서 제품을 들여와 중국에 되파는 형태였다. 화재경보기, 통신장비는 물론 다이어트 약까지 판매했다고 한다. 그러다 공공기관에서 전화교환기 교체를 준비한다는 정보를 얻고 홍콩에서 대량으로 제품을 수입 판매해 큰 이익을 남겼다. 이렇게 조금씩 자본이 모이자 런정페이는 기술 개발을 통한 통신제품 생산을 결심했다. 당시 중국의 정보통신 시장은 세계적인 다국적기업이 장악하고 있었다. 화웨이 같은 작은 회사가 직접 제품을 개발하겠다는 것은 ‘칭찬받을 도전’이 아닌 ‘무모한 도전’이었다. 하지만 런정페이는 혜안을 갖고 있었다. 그는 ‘정보화 시대’ ‘디지털 세상’에 뛰어들려면 자체 기술이 있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물론 처음엔 실패의 연속이었다. 자본, 시스템, 정보에서 뒤지는 화웨이는 기술 개발이라 했지만 외국 제품을 뜯어 모방하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런정페이의 기술 개발은 하나의 집념이자 신앙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조금씩 회사는 성장하기 시작했다. 당시 중국은 돈이 넘치고, 부동산, 주식의 호황기였다. 자고 일어나면 ‘부동산, 주식 투자로 갑부가 됐다’는 사람들이 줄지었다. 기업들도 마찬가지였다. 화웨이 내부에서도 갈등이 시작되었다. 창법 멤버들 중 일부는 런정페이에게 “기술 개발같이 어려운 길보다 부동산과 주식에 투자해 돈을 벌고 회사를 키우자”고 제안했다. 런정페이는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창업 멤버 세 명이 회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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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웨이 기본법’의 제1차 적용자, 리더

화웨이와 런정페이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그는 ‘디지털 프로그램 제어 교환기’ 개발에 회사의 모든 것을 올인했다. 런정페이는 물론 모든 직원들이 휴가, 퇴근을 반납했다. 그리고 사무실 한 편에 야전 침대를 두고 쪽잠을 자며 일을 했다. 화웨이의 기술 개발자들은 총 50여 명 정도다. 훗날 이들은 “이때부터 화웨이의 독창적인 기업 문화가 생겼다. 바로 ‘텐트문화’이다. 우리는 연구실에서 먹고 자며 목표 달성에 매달렸다. 다른 사람들이 화웨이를 텐트문화를 전근대적인 기업문화라고 비난해도 상관하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의 자랑스런 전통이고 우리의 역사이다”라고 술회했다.

1993년, 화웨이는 중국인민해방군에 네트워크 장비를 공급하기로 계약했다. 이는 화웨이의 기술력을 인정받은 것은 물론이고 오랫동안 런정페이를 괴롭히던 ‘반동분자의 아들’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런정페이는 자체 기술 개발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는 ‘화웨이 기본법’을 만들고 ‘매출의 10% 이상을 연구개발에 투자한다’는 것을 명문화했다. 하지만 중국 내수 시장은 에릭슨, 알카텔 등 세계 최고 통신회사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런정페이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베이징, 상하이, 충칭 등 대도시가 아닌 지방도시의 관공서, 기업들을 타깃으로 정했다. 이 판단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화웨이는 변두리, 작은 기업부터 공략하면서 이윽고 대도시와 큰 기업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화웨이는 국제 시장에서도 이 전략을 도입했다. 러시아, 아프리카, 태국, 브라질 등 세계적인 통신 회사인 지멘스, 알카텔 등이 등한시 하는 시장부터 진출해 점점 시장을 넓혀나가는 전략을 쓴 것이다.

그렇게 성장하던 화웨이에게 위기가 닥쳤다. 세계적인 금융위기, 닷컴 버블로 인해 화웨이는 주춤거렸고, 이 당시 약 2~3년 동안 런정페이 역시 우울증에 시달릴 정도로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긴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베이궈즈춘(北國之春)’이라는 노래를 수백 번씩 들었고 들을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고 회상했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IT와 벤처 기업이 무너지는 가운데 그래도 화웨이는 버텨낼 수 있었다. 그 원동력은 자체 기술 개발, 품질 우선주의를 고집한 런정페이의 리더십이었다.

런정페이는 세계 시장으로 도약하기 위해 가장 선진화된 미국식 기업 시스템을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IBM 경영자문단에게 약 5년간 화웨이의 경영 혁신 자문을 의뢰했다. 그리고 직원들에게 “여러분에게 ‘미국 신발’을 신길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미국 자문단에게 ‘미국 신발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알려달라고 할 것이다”고 발표했다.

이와 동시에 런정페이는 ‘화웨이 기본법’에 ‘화웨이는 정보서비스 분야에 진출하지 않겠다’를 명문화하라고 지시했다. 참모들은 “우리 스스로를 위축시킬 필요가 없다”고 반대했지만 런정페이는 “세계 최고의 통신장비업체가 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이는 물러설 곳이 없는 배수의 진이다. 일테면 ‘붉은 색 댄스 슈즈’는 유혹적이다. 그 슈즈를 신으면 지쳐 죽을 때까지 춤을 출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한 가지, 한 우물만 파는 기업이 되야 한다”고 이야기하며 태도를 물러서지 않았다.

런정페이는 독재적인 리더십을 발휘했지만 회사의 엄격한 규율에서 자신을 예외로 두지 않았다. 2000년 회사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직원들은 런정페이의 엄한 문책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런정페이는 “회사에서 가장 큰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은 바로 나다. 내 연봉을 삭감하겠다”고 발표하고, 친구가 운영하는 거래처가 비리에 연루되자 거래 단절을 지시했다. 이처럼 그는 비리와 부정부패에 대해서는 누구도 예외로 두지 않고 회사 규율대로 처리했다. 이뿐이 아니다. 런정페이는 회사 내에서 업무과실의 빈번한 발생, 사고에 대한 허위 보고 등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런정페이는 회사의 관리 책임을 물어 스스로 약 1억7000만 원의 벌금을 내겠다고 결정했다. 임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부회장, 대표 등 전 임원들도 약 8000만 원의 벌금을 내는 등 엄한 질책을 받았다. 런정페이는 이를 통해 회사의 규칙, 화웨이 기본법은 그저 사문화된 조항이 아닌 화웨이의 살아있는 힘이자 지켜야 할 원칙임을 스스로 보여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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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취업하고 싶은 회사 1위

화웨이는 빠르게 성장했다. 2012년 드디어 매출 350억 달러를 기록했다. 이 같은 성장의 뒷받침은 역시 지속적인 연구개발 투자였다. 화웨이는 2000년부터 인도 방갈로르에 R&D센터를 열고 소프트웨어 개발자 5000여 명을 영입해 소프트웨어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들을 포함해 화웨이의 약 18만7000명의 직원 중 R&D 인력만 7만 명이고 매출의 15% 정도를 연구개발비에 투자하고 있다. 현재 겉으로 보이는 화웨이의 사업 구조는 통신 네트워크 장비, 스마트폰 등의 하드웨이에 집중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화웨이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회사의 모습은 소프트웨어 기업이다. 이를 위해 클라우드 컴퓨팅, 소프트웨어 개발 및 디자인에 현재 회사의 전 연구인력과 자본을 투자하고 있다. 그 효과는 다방면에서 빠르게 나타났다.

화웨이는 2010년 다른 스마트폰 제조사에 비하면 한참 늦게 시장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자체 개발한 UI와 다양한 앱을 바탕으로 불과 3년 만에 삼성, 애플에 이어 세계 시장 점유율 3위를 기록하고, 중국 시장에서는 2017년 1억250만 대를 판매해 시장 1위를 차지했다. 화웨이는 저가형 스마트폰과 프리미엄 라인업을 확보하고 온라인과 오프라인 매장으로 구분한 판매 전략을 쓰고 있다. 즉 저가형은 온라인에서 점유율 확산에, 프리미엄 라인은 오프라인에서 수익 증대를 위해 판매하는 것이다. 물론 화웨이는 미국 등 서방 시장의 경계와 의심을 사고 있는 통신장비 확대보다는, 수입 장벽과 거부감이 덜한 스마트폰을 통해 우회 시장 진출 전략으로 스마트폰 사업에도 전력을 다하고 있다. 이는 런정페이가 주장한 중심부보다는 주변부를 공략한다는 전략에서 나온 것이다.

이 같은 화웨이의 성장 전략에서 가장 중심으로 여기는 것은 역시 사람이다. 런정페이는 자신의 열정적인 리더십이 직원들의 진취성과 도전 의식을 고취한다고 믿고 있다. 그는 인재 발굴을 위해 최고의 대우, 최선의 서비스를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제공하고 직원은 능력과 창의성을 발휘해 이에 보답해야 회사가 성장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기 위해 런정페이는 다른 회사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CEO 운영 시스템을 도입했다.

그는 7개 사업부문 총책임자로 구성된 EMT(Executive Management Team)를 조직해 책임경영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는 곧 여러 폐단을 드러냈다. 각 부문장들이 런정페이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고, 또한 부서 이기주의 발생이 그것이다. 이에 런정페이는 이른바 ‘순환 CEO(Rotating CEO)’ 제도를 마련했다. 즉 7명의 파트장이 6개월마다 돌아가면서 CEO를 맡게 한 것이다. 초기에는 잦은 CEO의 교체로 인한 부작용이 생겼다. 이에 런정페이는 궈핑, 후호우쿤, 쉬즈쥔 등 3명의 CEO가 로테이션으로 화웨이의 대표 CEO를 맡는 시스템을 정착시켰다. 이를 통해 각 사업부의 균형과 견제가 가능해졌고, CEO의 임기 동안 권력과 권한의 집중은 물론 사내의 줄서기 문화도 없어지게 되었다.

현재 화웨이가 집중하는 분야는 ‘클라우드 컴퓨팅 센터’이다. 런정페이는 영화 <2012>를 보고 이른바 정보의 홍수 시대가 도래했을 때 그 막대한 정보를 수집, 구분, 분석하는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화웨이 내에 이른바 ‘노아의 방주 실험실’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를 총 480개까지 늘리면서 2020년에는 이 사업부문에서만 약 100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올해 74세의 런정페이, 그는 아직도 화웨이의 최전선에 서있다. 이 열정 가득한 ‘독재자’는 한 손에는 당근을, 또 다른 손에는 채찍을 들고 화웨이 18만7000명의 직원들을 독려하고 있다. 그가 꿈꾸는 화웨이의 완성된 모습은 세계 최고의 통신장비 회사, 세계 1위의 스마트폰 제조사, 세계 1위의 클라우드 정보 회사이다.

런정페이는 아직도 자신의 전용 자동차가 없고, 스마트폰도 화웨이 매장에서 직접 구매한다. 또 신입 사원은 박사도, 경력 직원도 무조건 제품 공장에서 3개월 근무하게 한다. 마치 ‘20세기적 리더십’의 표본 같지만, 그는 중국 젊은이들이 ‘가장 입사하고 싶은 회사 1위가 바로 화웨이이다’라고 말하는, ‘직원을 위한’, 디지털 세상의 리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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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십 | 열정과 도전 그리고 공동체 의식으로 전진하라

런정페이 리더십의 핵심은 ‘늑대 정신’이다. 그는 1998년 <화웨이의 붉은 깃발은 언제까지 펄럭일 것인가?>라는 글에서 자신의 리더십을 설명했다. 화웨이의 초창기 정신은 ‘산양론’이었다. 산양은 사자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 더 빨리 더 높이 올라갔다. 화웨이는 창업 초기 세계적인 통신장비 기업들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기 위해 뛰어가는 산양이었다. 하지만 이제 화웨이는 약육강식의 시장에서 강한 존재인 늑대가 되었다. 런정페이는 말한다.

“낭패(狼狽)라는 말이 있다. ‘낭(狼)’은 앞다리가 길고 뒷다리가 짧은 늑대를, ‘패(狽)’는 앞다리가 짧고 뒷다리가 긴 늑대를 말한다. 두 짐승이 같이 나란히 걷다가 사이가 벌어지면 순간 균형을 잃고 넘어지는 것을 낭패라고 한다. 기업 역시 마찬가지다. 시장을 개척할 ‘낭’을 앞세우고, 동시에 인솔에 능하고 종합적인 경영 플랫폼을 구축할 줄 아는 ‘패’가 필요하다. 기업이 발전하려면 낭과 패의 세 가지 특징을 모두 지니고 있어야 한다. 첫째, 민감한 후각. 둘째, 불굴의 진취성. 셋째, 팀플레이 정신이다.”

이는 민감한 후각으로 시류를 읽어 개척할 시장을 파악하고, 트렌드에 뒤떨어지지 않는 제품을 생산하는 것이다. 또 불굴의 진취성은 열정적인 도전의식과 공동체 의식의 책임감과 단결심으로 무장한 기업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같은 런정페이의 리더십은 화웨이만의 독특한 기업문화인 ‘텐트 문화’와 ‘늑대 정신’으로 나타나 기업 성장을 견인했다. 런정페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도전, 모험 그리고 열정이다. 그는 ‘모험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고 말한다. 그 모험의 증거가 ‘화웨이의 막대한 연구개발 투자’라고 런정페이는 자신 있게 말한다. 양사오룽의 <위기를 경영하라>를 보면 런정페이의 도전 의식에 대한 정확한 글이 있다. “물론 용기와 도박심리가 세계 하이테크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필수 요소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기회가 왔는데도 ‘큰 판’을 벌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랬다면 지금 화웨이는 ‘패배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것이다.(-82p)”

그러면서 런정페이는 직원들에게 ‘눈은 고객을 향하고, 엉덩이는 사람을 향하라’고 주문한다. 이는 상사에게 아부나 하는 직원이 되지 말고 고객과 시장을 먼저 생각하라는 뜻이다.

강력한 지배력으로 화웨이를 이끄는 런정페이. 그의 리더십에서 차가운 경영자의 고독을 일면 발견할 수 있을 지 모른다. 하지만 런정페이는 조직원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갖고 있는 리더이다. 잔인한 구조조정, 돌격대 스타일의 경영, 뚜렷한 상벌, 열정과 도전만이 가득한 회사처럼 보이는 것이 화웨이고 런정페이이지만, 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다.

 

때로는 장점과 단점이 대립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의존하기도 한다”고 말하는 포용의 리더인 것이다.

런정페이 리더십의 핵심은 물론 열정이다. 그 스스로 이 같은 도전으로 30년 동안 화웨이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뒤에 숨어있는 ‘따뜻한 공동체 의식’이 있었기에 화웨이는 오늘도, 용광로 같은 뜨거움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글 박기종(커리어코칭 칼럼니스트) 사진 위키미디어, 픽사베이 인용 및 참조 <런정페이, 경쟁의 지혜>(장위 지음/ 이호철 옮김/ 린 펴냄), <위기를 경영하라>(양샤오룽 지음/ 송은진 옮김/ 북스톤 펴냄), <화웨이의 위대한 늑대문화>(텐타오, 우춘보 지음/ 이지은 옮김/ 맹명관 감수/ 스타리치북스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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