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여성CEO 열전] (20) 남미경 한만두식품 대표​

2014-06-05

속이 꽉 찬 만두처럼 어려움에 처한 아이들 품는다
 

[기독여성CEO 열전] (20) 남미경 한만두식품 대표 기사의 사진

 

남미경 한만두식품 대표가 지난달 31일 경기도 양주 그루고개로 회사 앞에서 두 손으로 하트 형태의 만두 모양을 그리며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다. 남 대표는 "한만두 속에는 찬양과 웃음이라는 양념이 더 들어가기 때문에 다른 만두와 비교할 수 없는 맛을 느낄 수 있다"고 자랑했다.

 

그는 2644㎡(800평) 규모의 공장에서 70여명 직원을 거느리는 대표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왜소했지만 목소리는 '여장군'감이었다.

한만두식품㈜ 남미경(52·높은뜻푸른교회 권사) 대표는 서울 도봉동 난민주택에 살던 어린시절 만두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만두를 좋아했다. 아버지는 당시 소문난 구두 디자이너였다.

아버지는 워낙 자유분방한 분이라 제화회사에 들어가지 않고 집에서 가내 수공업을 했다. 그래서 1남3녀의 몸에선 늘 소가죽 냄새가 진동했다.

학교에 가면 친구들은 코를 막고 돌아섰다. 등굣길에서 어처구니없는 일도 많이 당했다. 날 때부터 곱슬머리였는데 파마를 했다고 학교 선도부에게 잡히기 일쑤였다. 교대에 들어가 선생님이 되는 게 꿈이었다. 하지만 서울 혜화여고를 졸업하던 1982년 아버지가 쓰레기차에 치여 다치는 바람에 대학 진학도 포기하고 화장품 회사에 취직해 소녀가장이 됐다. 아직 철도 덜 든 24세에 ‘산사나이’에 빠져 남매를 낳고 6년 만에 이혼을 하고 ‘보험 아줌마’가 됐다.

남 대표가 만두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인연을 맺은 것은 1999년 초였다. 보험영업 실적이 좋아 유럽여행 티켓을 상으로 받았다. 여행 중 가이드가 들려준 ‘기가 막히게 맛있는 만두 총판’ 얘기에 입이 쩍 벌어졌다.

여행에서 돌아온 남 대표는 수소문 끝에 인천에 있는 만두공장을 찾았지만 문전박대를 당했다. 하지만 포기할 그가 아니었다. 삼고초려 끝에 간신히 3000만원을 주고 판권을 샀다. 신세계백화점과 대형 마트에 납품하는 등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만두를 팔았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사업은 3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그해 3월 한 냉동 만두회사에서 대장균이 검출됐다는 충격적인 뉴스가 터졌다. 매출은 10분의 1로 곤두박질쳤고, 두어 달 지나자 적자가 났다.

그때 남 대표는 ‘역발상’ 카드를 꺼냈다. 직접 만두를 빚어 팔자는 생각으로 ‘한만두식품’을 창업했다. 제조기술 없이 시작한 사업은 순탄할 리 없었다. 수억원대 빚쟁이가 됐다. 3년이 되는 해에는 급기야 신용불량자 신세로 전락했다. 월급을 주지 못해 10명 남짓이던 직원들이 모두 떠나버렸다.

남 대표는 신앙의 힘으로 ‘빚만 갚고 관두자’는 마음을 굳혔고, 하루 2시간만 자며 맛있는 만두 빚기에 몰입했다. 이틀, 사흘 간격으로 코피를 쏟는 열정으로 3년 만에 모든 빚을 청산했다.

그러나 위기는 또 찾아들었다. 2004년 6월 쓰레기로 버려지는 단무지로 만든 만두가 시중에 유통되고 있다는 경찰청 발표가 나오면서 매출이 뚝 끊겼다.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한 남 대표는 한 달가량 문을 닫았다. 만두 사업을 접고 선교사로 나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온누리교회 고(故) 하용조 목사님이 극구 말렸다. “굳이 선교사가 되지 않더라도 자신의 일을 통해 사회에 얼마든지 기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포기하지 마세요.”

남 대표는 이때부터 ‘1+1’ 기부방식을 도입했다. 만두 3개가 든 세트상품을 구매하면 동일한 양만큼 소외 이웃에게 전달하는 방법이다. 지난해 12월부터는 기아대책과 협약을 맺어 기부하고 있다. ‘벌어서 남 주는 경영’은 정말로 기적을 낳았다. 2010년 마침내 빚 한 푼도 없는 제로 경영에 성공했다. 하지만 2011년 구제역이 엄습했다. 대출 받아서 월급을 주고 신용카드를 긁어서 간신히 버텼다. 또다시 폐업을 생각하던 남 대표는 그해 3월 기독실업인협회(CBMC)를 만나서 3가지 큰 비전을 세웠다. 맛있는 만두를 빚어 어려운 이웃과 북한이탈주민을 돕고 복음을 전하며 나아가 통일이 되면 북한에 만두 공장을 세우는 것이다.

이를 위해 남 대표는 대표이사 명패도 팽개치고 직접 앞치마를 두르고 밀가루를 뒤집어썼다. 3년 동안 경영도서 100권을 독파했다. 그해 7월 남 대표는 경기도 양주 그루고개로 일대 4628㎡(1400여평)의 새 공장 부지를 샀다. 2억5000만원의 계약금을 내고 땅을 샀지만 건축비를 포함해 50억원 정도가 드는 큰일을 감당할 재간이 없었다. 일하면서 기도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철커덕∼” 왼손 약지 한마디 반이 잘려버렸다. 바닥에 떨어진 손마디를 집어 들고 의정부성모병원으로 실려 간 남 대표는 4시간 동안 응급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입원 일주일 만에 간에 혹이 4개가 있다는 날벼락 같은 소리를 들었다. 직원들은 남 대표를 위해 밤낮으로 기도에 들어갔다. 거짓말처럼 간에 있는 혹은 더 이상 자라지 않는 것으로 확인돼 퇴원했다. 하지만 어렵사리 접합한 손가락 두 마디는 까맣게 변해버려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었다.

2012년 7월이 다 되도록 새 공장 사업은 진척이 없었다. 남 대표가 선택한 길은 엉뚱하게도 전도여행이었다. 예수전도단 독수리학교에 들어가서 10일 동안 동행자 10명과 오직 한 가지 해답을 찾는 일명 ‘거지순례’에 참여했다. 독수리학교를 다녀온 효과였을까. 남 대표가 만드는 만두 맛에 푹 빠진 한 독지가의 도움으로 공사는 시작됐고 지난해 2월 공장을 이전했다.

남 대표는 한 달에 한번 직원들과 함께 인근에 있는 ‘나사로의 집’을 찾는다. 여기는 범죄를 저지른 여학생이 소년원에 가기 전 잠시 머무는 곳이다. 남 대표는 올여름엔 여학생 한 명을 회사에 데려와 함께 지낼 계획이다. 회사 내에 있는 대안학교 좋은나무학교엔 초등학교 1학년 3명, 4학년 2명, 중학생 2명 등 7명이 한만두의 은혜로 쑥쑥 자라나고 있다.

남 대표는 새 공장을 짓기 전까지 매출의 15%가량을 기부했다. 3년 전부터는 매출의 1∼2%를 기부하고 있다. 남 대표의 꿈은 고아원을 설립하는 것이다. 남 대표는 “부모 없는 아이들과 무작정 집을 나와 방황하는 아이들을 돌보고 싶다”면서 “특히 굶주림으로 허덕이는 북한 어린이들을 살리는 것이 한만두 공동체의 큰 사명”이라고 말했다.

남미경 대표

△1963년 서울 출생 △1999년 수제 물만두 한만두 설립 △2011년 농업회사 법인 한만두식품㈜ 설립 △2012년 중소기업청장상 수상 △2013년 일하기 좋은 으뜸기업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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