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정밀공업 김홍렬 사장 "창조가 시장을 만든다"…페트병 금형 국내 1위 업체 '우뚝'​

2013-12-27

기업인 탐구 - 동아정밀공업 김홍렬 사장 

일본계 기업서 금형기술 공부… 2년 후 퇴사해 국산화 착수
용기와 손잡이가 같은 재질 '일체형 페트병' 자체 개발…안전하고 경제성까지 뛰어나 
미국·남미 등 해외로 눈돌려 매출 40% 수출로 달성

 

김홍렬 동아정밀공업 사장(왼쪽)이 부천 본사 공장에서 직원과 함께 생산 중인 프리폼 금형 제품과 와이드마우스 페트병을 살펴보며 얘기를 나누고 있다. /은정진 기자

 

경기 부천시 오정동 오정산업단지에 있는 동아정밀공업. 직원 112명, 연매출 200억원(지난해 기준)을 올리는 이 회사는 겉으로 보기엔 여느 중소기업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기술력은 비범하다. 이 회사는 페트(PET) 용기를 만드는 원재료인 프리폼 금형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국산화했다. 30년간 품질을 개선해 가며 현재는 페트 금형분야 국내 1위 기업이 됐다.

30년 전만 해도 국내 페트 금형은 국산화가 힘든 분야였다. 독일과 일본 등 선진국의 기술을 그대로 베끼는 수준이었다. 0.003㎜ 미만의 오차 내에서 병 주둥이의 복잡한 돌기 부분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 그 이상 오차가 나면 뚜껑의 아귀가 맞지 않아 불량 처리된다. 

김홍렬 동아정밀공업 사장(67)은 1977년 일본계 금형기업인 신화정밀에 입사해 플라스틱 금형분야에 뛰어들었다. 그로부터 2년 후 회사를 나와 페트용 프리폼 금형 국산화 개발을 시작했다.  

프리폼은 공기를 넣어 페트병이 되기 전 단계의 재료다. 기초 데이터나 기술도 전혀 없었다. 그는 “프리폼에 얼마의 공기를 넣어야 얼마만큼 늘어나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아는 게 없었다”며 “일일이 프리폼에 눈금을 그어가며 늘어나는 수치를 체크했다”고 말했다. 직접 해외전시회를 찾아다니고 수입 장비를 구입해 2년을 연구한 끝에 1981년 프리폼 금형을 처음으로 국산화했고 이듬해인 1982년 동아정밀공업을 세웠다. 

김 사장은 국산화한 프리폼 금형 제품을 ‘대경’이라는 페트 제조업체에 납품했다. 거래 중 대경 쪽에서 “프리폼 금형뿐만 아니라 유아용품업체인 아가방에 납품할 젖병까지 페트로 직접 만들어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그는 젖병 금형세트를 6000만원에 만들었다. 당시 수입 금형기계로 만든 젖병 금형세트는 3억원이었다. 회사가 번창하면서 그가 키웠던 페트 금형 인재들이 기술을 들고 나가 회사를 차리면서 국내 페트 금형 시장이 좁아지기 시작했다. 김 사장은 해외로 눈을 돌렸다. 유럽, 미국, 남미, 아프리카까지 30여개국에 프리폼 금형을 납품했다. 회사는 지난해 매출의 40%를 수출로 거뒀다.

○사소한 재미 느끼며 금형 시작 
 

 

동아정밀공업이 국내 페트 금형 분야의 선도 업체가 된 데는 세 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 일에 대한 재미와 호기심이다. 김 사장이 처음부터 금형 전문가는 아니었다. 그는 1965년 첫 직장으로 내쇼날전자에 들어가 제품 설계를 맡았다. 일본에서 30㎜짜리 압출기가 들어오면 수만 가지 부품을 모두 분해해 스케치한 뒤 이를 50㎜, 100㎜ 압출기로 대형화하는 일을 했다. 김 사장은 “혼자 해야 하는데도 일 자체가 매우 재미있었고 부품 하나가 가진 역할이 궁금했다”며 “프로젝트가 생기면 집에 들어가는 것도 잊고 회사에서 야전침대에 모포 3장만 깔고 자면서 일을 끝냈다”고 회상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금형에 재미를 느끼게 된 건 군 전역 후인 1973년. 대한전선 설계실에 들어가면서부터다. 냉장고, 선풍기, TV 등의 금형과 프레스 등 여러 작업을 맡았다. 김 사장의 열의 어린 모습을 알아본 당시 페어차일드반도체는 1977년 그를 스카우트했다. 페어차일드에서도 집적회로(IC) 설계와 금형 발주를 담당했다. 

그는 예비군 훈련장에서 우연히 알게 된 한 친구 덕분에 금형에 더 매진할 수 있었다. 이 친구는 1976년 금형회사를 세우며 금형업에 막 뛰어든 사람이었다. 김 사장이 “금형 진짜 할 줄 아냐”고 묻자 그 친구는 “난 금형 하나는 제대로 만드는 사람”이라며 “어떤 제품이든지 주기만 하면 확실히 만들어내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 친구가 김학권 재영솔루텍 회장이었다. 재영솔루텍은 금형 분야에 정보기술(IT)을 접목해 세계를 공략하고 있는 히든챔피언 기업이다. 페어차일드에서 금형 발주를 맡은 뒤 매번 금형 발주가 늦다며 상사에게 혼이 났던 김 사장은 김 회장과의 인연으로 사업에 도움을 주고받았다. 당시 김 회장만의 자신감을 보며 금형 명장에 대한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창조가 시장을 만든다 
 

 

둘째는 ‘창조는 시장을 창조한다’는 정신이었다. 김 사장은 아무도 만들지 못하는 제품을 만들어야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1990년대 초 그는 다시 남들이 하지 않은 시도를 했다. 해외 수출용 금형 테스트장비가 시험제작에만 쓰이는 게 아까워 새롭게 개조했다. 당시 김 사장은 좁은 입구의 페트병 시장을 잡고 있던 효성, 삼양사, 두산 등에 납품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과 직접 경쟁하기보단 새 시장을 만드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개조한 테스트 장비로 만들어 낸 것이 ‘와이드마우스(wide mouth) 페트’였다. 당시 병 주둥이가 넓은 와이드마우스 페트는 국내에서 처음이었다. 멸치액젓이나 각종 젓갈, 고추장, 된장 등 밑반찬 보관으로 쓰이던 폴리에틸렌(PE)병이 순식간에 동아정밀공업의 와이드마우스 페트로 바뀌기 시작했다. 식당에서 흔히 보는 각종 주류 브랜드 라벨이 붙은 물병도 전부 동아정밀공업의 제품이다.

셋째는 경험속에서 아이디어를 찾는 것이다. 김 사장이 와이드마우스 페트를 만들었지만 당시 국내 메이저 주류업체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김 사장은 자신과 비슷한 연배였던 사장들이 분명 자신처럼 회사 근처 식당에서 자주 밥을 먹을 거라 판단하고 주류회사 근처 식당에 와이드마우스 페트병을 100개씩 뿌렸다. 일주일이 지나자 그의 예상대로 와이드마우스 페트를 직접 본 주류업체 사장들의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장들은 동아정밀공업의 페트병을 판촉용 물병으로 쓰라고 지시했다. 국내 판촉용 물병이 불투명하고 두꺼운 폴리에틸렌(PE)병에서 가볍고 투명한 페트병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다. 김 사장은 “현재 국내 식당 등에서 쓰이는 1억병가량의 물병이 모두 우리 제품”이라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경험 속 아이디어가 성공을 이끌었다”고 설명했다. 페트 종류가 다양해지면서 기존 생산장비로는 만들 수 없는 제품이 생기자 생산설비까지 직접 제작했다. 

○“인류에 기여하는 페트 금형 만들 것” 

김 사장의 휴대폰을 열면 항상 적혀있는 문구가 있다. 바로 ‘인류를 위하여’다. 그는 자기만 배불리 먹고 사는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뭔가를 하고 죽어야 한다는 경영철학을 갖고 산다. 최근 개발한 ‘일체형 페트병’도 그의 인류애가 깃든 제품이다. 일체형 페트병은 페트의 손잡이와 용기를 같은 재질로 한번의 공정을 통해 만든 제품이다. 지금까지 우유나 식용유, 간장, 식초 등을 담는 용기들은 폴리에틸렌(PE)병을 써왔다. 불투명한 폴리에틸렌은 내용물의 신선도나 이물질 여부를 확인하기 어렵다. 

일체형 페트병은 이들 제품보다 안전한 데다 경제성까지 뛰어나다. 폴리프로필렌으로 성형 조립할 경우 개당 단가가 312원이 들지만 일체형 페트병은 250원 정도가 든다. 또 재활용을 위해 손잡이를 분리할 때 드는 개당 3원의 분담금도 아낄 수 있다. 결국 1000만개 제품을 생산할 때 6억5000만원을 절약할 수 있다는 게 김 사장의 설명이다.


김 사장보다 앞서 비슷한 일체형 페트병을 내놓았던 프랑스 페트병 제조업체 지델의 관계자도 김 사장의 일체형 페트병을 보고는 “미끄러지지 않도록 손잡이를 페트 안쪽으로 깊숙히 잡게 만드는 기술은 아직까지 시도된 적이 없었다”며 감탄했다. 그는 “남과 같이 해서는 절대 남보다 앞서갈 수 없다는 자존심 하나만큼은 처음 회사를 차릴 때나 지금이나 같다”며 “지금껏 나를 먹고 살게 해 준 금형을 근간으로 앞으로도 남들이 깜짝 놀랄 페트 제품들을 계속해 보여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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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hankyung.com/article/2013122654951?nv=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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